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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역사프리즘/현대정치사

[꼬꼬사 3-4] 정인숙 후견료는 사천억? 건달에게 '공짜는 없었다'

 

정인숙 후견 대가가 4천억?

공짜충성은 없다! 그는 과연 풍운아일까.

 

  1. [꼬꼬사 3-3편] 섹스, Drug, 야쿠자, 그리고 정건영
  2. [꼬꼬사 3-2] 65년 한일협정과 정건영 : 야쿠자, 한국을 '이용'하다
  3. [꼬꼬사 3-1] ‘긴자 호랑이’ 정건영과 야쿠자- 3공 커넥션.
  4. [꼬꼬사 2편]정인숙의 70년 3월, 그날의 의문들/누구의 씨앗일까
  5. [꼬꼬사 1편] 3공 최대의 권력형 섹스‧살인 스캔들 ‘정인숙사건’…진실은 무엇일까.

[1977628, 재무위원회 국정감사장]


고재청 위원 : 장관! 정건영이는 일본국적을 갖고 있고 귀화해 버린 사람입니다.

 

천명기 위원 : 저당순위가 일본이다(1번인 듯) 이렇게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정건영씨가 일본 부동산은행에서 526천만엥을 꾸어 쓴데에 대해서 외환은행이 지불보증을 한 것입니다. 일본 부동산은행이 저당을 했을텐데 왜 우리 한국외환은행이 저당을 했습니까?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고재청 위원 : 지금 말이요 54억엔을 내줄 때 그것은 외환은행동경지점장 책임 하에 나간 것입니까? 외환은행본점행장까지 갔습니까? 그 외에 은행감독원장은 보고가 됐습니까? 재무부장관은 어떻게 됐습니까? 재무부관리재국장선에서 끝났습니까? 그것 좀 분명히 해 주세요.

 

김윤하 위원 : 내가 물은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설명만 하세요. 이렇게 융자를 했을 때 어떻게 돼서 융자가 됐고 이렇게 채권확보는 하고 있습니다. 또 도중에 기업이 잘 안돼서 중단을 하고 그때 부터는 회수를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그칠 문제입니까?

 

김용환 재무부장관 : 김 위원께서 어제 안계셨는지 모르지만 저도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은 아닙니다. 외환은행의 감사가 현지에 가서 대사관과 협력해서 확인한 결과는 교포입니다. 일부 항설이 있고 또 제가 여러 위원님들이 주장해서 경청을 해야 될 그런 입장에 있지 않습니까?

 

77년 국회 재무위원회는 국회의원들의 고성으로 떠들썩했다. 신민당 출신 의원들과 재무부장관 김용환은 외환은행이 정건영에게 불법적으로 채무보증을 선 사건을 놓고 날선 공방을 벌인 것. 록히드 스캔들이 터져 정건영이 부도를 내자, 현재 시가 4000여억 원 상당의 채무액을 대한민국 정부가 떠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문제? 3공의 요부 정인숙과 피스톨 박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67년 노골적인 관권·금권 선거운동을 강행한 신군부 세력은 같은 해 열린 대통령,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하며 본격적으로 장기집권 공작에 착수했다. 정권 차원에서 3공 흠집 지우기가 시작됐는데, 68년 아이를 출산한 요부정인숙도 그 대상이었다. 그녀의 사내아이가 박정희의 씨앗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 최고의 호스티스 정인숙과 권력 사이의 스캔들. 소문이 확산되자 청와대 박종규 경호실장은 내사에 착수, 일본을 오가며 염문설을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정인숙은 당시로선 극히 드문 회수여권을 손에 쥐고 미국 워싱턴과 일본 도쿄로 외유를 떠난다.


이 시기, 정건영과 정인숙이 만났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의 증언에 따르면, 박종규 실장이 그와 가장 가깝던 정건영에게 정인숙 모자의 후견인 역할을 부탁했다고. 김재춘은 “(정인숙이)자꾸만 청와대를 귀찮게 하자 경호실장 박종규는 골치가 아파졌다. 여권을 만들어 미국으로 내보냈으나 자꾸만 귀국하겠다고 해서 일본에도 머물게 했다면서 그때 일본에서 박종규 실장과 가아 친한 사람이 정건영 씨였다정건영씨에게 정인숙 모자를 돌보아달라고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공을 외치며 한국 실세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아왔던 마치이 히사유키였기에 실세 피스톨 박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그는 조건을 달았다. 국책은행이었던 외환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대부를 요구한 것이다. 김재춘의 말


정건영은 그(정인숙 후견) 대가로 거액의 사업자금을 도쿄의 외환은행에서 빌려 쓸 수 있도록 실력자인 박실장에게 부탁했다. 외환은행은 68년부터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빌려주었는데 그 액수가 원금만 100억 엔이 넘었고 결국 정건영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원금도 못 건졌다. 그러나 정건영은 차용금으로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며 땅을 샀는데 십수년이 지나 땅값이 폭등해 떼돈을 벌었던 것이다. 그러나 외환은행에 빚을 갚지 않아 재판이 계속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정인숙이 출산한 지 한 달이 지난 687, 정건영이 외환은행과 첫거래를 시작됐다는 점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권력과 여인>을 지은 이정식은 정인숙 사후에도 추가 대출이 이뤄줬기 때문에 정여인을 보호한 대가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추가 대출은 부도로 인해 발생할 매몰비용을 최소화 하기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점, 고재청의 지적처럼 “100억 가까운 돈을 일본 사우나」 「빠징꼬또 부동산 브로커에다 대주면서 귀화여부처럼 기본적인 신원 확인조차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 또 다수의 재무부 관계자들의 증언을 고려하면 정권 실세의 입김이 외환은행 거래를 튼 계기를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정인숙 후견 대가가 4000

눈덩이 맞은 외환은행

 

정건영이 연줄을 이용해 외환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부당 대부를 받은 이유는 부동산 투기 때문이었다. ‘돈은 땅에 묻으라, 예나 지금이나 졸부들 제 1의 제테크 수단은 부동산아닌가. 정건영은 히로뽕, 스포츠 외교, 요정·빠징꼬 사업과 함께(<3편 정인숙, Sex, Drug & 정건영>참조) ‘흑막고다마 요시오와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만졌다.

 

외환은행 자금이 필요했던 토지는 천황의 하계 휴양지로도 유명한 시라카와의 72만 여 평과 TSK-CCC 빌딩의 300여 평 대지였다. 김충식 기자의 말에 따르면 시라카와는 곳곳에 온천구멍이 있어 관광휴양시설 개발이 한창인 지역인데다, 신간센고속철도가 지나갈 자리여서 지가 상승이 기대되는 구역이었다고. 도쿄 롯본기 중심가에 위치한 TSK 빌딩 또한 경제적 가치가 높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부동산은행은 시라카와 고지, TSK-CCC 빌딩 대지 구매대금으로 각각 32억엔, 21억엔, 53억엔을 정씨에게 융통했고, 외환은행은 이 융자액에 대한 채무보증을 섰다. 77년 고재청 위원이 국정감사에서 지적한대로, 엄격히 말하면 외환은행은 융자를 해준 것이 아니라 대불약정을 체결한 것이다.

 

53억엔을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100억여 원. 쌀 도매가(80kg 기준 68, 4289, 201317248)를 기준으로 현재 가치를 추정하면 4천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재무위 의원들이 우리나라 돈 100억 가까운 돈을 일본 사우나」 「빠징꼬또 부동산 브로커에다 대준 것이 교포육성책 보호책이냐”, “차라리 1960년 후반기 (박 모씨)권력이 개재했다() 말을 해라” “마찌이라는 것은 일본을 누비는 가다라는 것은 전 세상이 다 아는 것이 아니냐”(고재청 의원), “수십억 해 놓고지금 와서 귀화를 했는지 안했는지 조사를 해 보겠다는 건 말이 안돼”(김윤하 의원) 며 날을 세우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재일 야쿠자에 대한 대한민국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건영의 미숙한 경영관리”, 73년 오일쇼크와 경제위기로 인해 정씨 사업이 큰 타격을 입자, 외환은행은 본전이라도 찾자는 마음에, 부도방지자금, 사채정리지원금으로 총 95억을 재차 쏟아 부었다. 김용환 당시 재무부 장관은 이렇게 복기했다.

 

지금 기억하기에 외환은행이 그를 살리기 위해 한 달에 4억 엔씩을 쏟아 넣는 형편이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돈을 털어 넣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문제는 일본 사회당 등 야당이 정건영 씨 재산을 박 대통령 몫이라는 식으로 의회에서 질의까지 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시끄러워지고 있었다어쨋든 통치권 차원에서도 부도처리해야 할 것 같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결심을 받아냈다

 

도산에 직면한 정건영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정씨는 본인의 집무실을 찾아와 당신 뭘 잘 모르고 이러는 거 아닌가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절친박종규도 여러 차례 김용환에게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40대의 패기(?)넘쳤던 김용환은 결국 동아상호기업을 부도처리를 강행, 정건영은 미국으로 도피했다. 78, 본인이 소유한 온천공을 개발해 채무액을 상환한다는 부활계획을 세웠지만 이 또한 허사로 돌아갔다. 김준영 당시 외환은행장의 말에 따르면, 시추 결과 물이 너무 미지근(!)했다고


정건영 재산에 대한 부도처리는 79, 박정희 암살사건이 터지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5공 정부가 의욕적으로 외환 회수작업에 착수했으나, 최종적으로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것은 1997. 무려 30여년이 지나서야 상환 받게 된 것(원금 150억엔과 연체이자 290억엔)이다. 김충식의 표현처럼 끗발들의 횡포가 빚은 생체기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다음은 "김대중 납치사건 재일교포 연루설. 그 진실은?", 그리고 4편 "'테러 쯤이야' 곤조의 정치인 열전" 꼭지가 새로이 시작됩니다. 매주 목요일,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분의 엄지는 언제나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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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ver2886@hanmail.net 배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