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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역사프리즘/현대정치사

[꼬꼬사 3-1] ‘긴자 호랑이’ 정건영과 야쿠자- 3공 커넥션.

고다마를 통해 일본 내 좌익과 노동운동 타도에 동원된 대표적인 야쿠자 조직이 한국계 마치이 히사유키가 이끄는 도세이카이(東聲會)였다. 마치이는 1923년 한국에서 출생해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으로 1948년 한국계 야쿠자를 규합하여 도세이카이를 결성했다”(21세기 초국가적 조직범죄와 통합안보, 조성권, 173p)


역도산이 이북출신인데 이북에 딸이 하나 있다. 그래서 그 딸 편지 받고 이북으로 가려 했으나, 내가(정건영) 가면 죽인다고 해서 못 갔다.” (김대중 대 김영삼, 42p)


대한축구협회는 구랍 31일 재일교포 정건영(재일대한체육회지부 고문), 이유천, 김세기 씨 등 3명에게 그동안 한국축구 발전에 협조해준 것을 치하하는 감사장을 전달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 축구의 재건을 위해서 오래도록 물심양면의 협조를 해왔었다”<경향> 1968. 1.4 8


대한체육회 재일지부 정건영 회장은 20일 하오 610월 유신사업추진에 노고가 많은 국내 체육인들을 반도호텔 다이너스티 룸에 초청, 성대한 칵테일 파티를 베풀었다.”매일경제 1972.11.21. 7


일본에서는 정건영과 문학림이 (정인숙의) 뒤를 봐줬다.”

 


성공한 사업가야쿠자극우 정치깡패스포츠 외교가까지정건영(일본명 마치이 히사유키)의 캐릭터는 복잡하고 입체적이다6-70년대 긴자 호랑이로 불리며 도쿄 밤거리를 주름잡았던 그는 일본 흑막정치의 실세를 등에 업고 ‘65년 한일 수교’, 김대중 납치사건 등 굵직한 사건에 개입했던 극우 폭력분자였으며, KOC(한국올림픽위원), 재일본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며 열악했던 한국 스포츠현실에 물을 댔던 애국’(?)주의자이기도 했다.

 

역도산의 친구였으면서 그를 억압한 것도, 정인숙의 후견인을 맡았던 ‘3공 정권안보의 첨병이자 대한민국에 2천억의 외채를 떠안긴 것도 정건영이었다. 과감하면서도 변화무쌍한 그의 행적은 재일한국인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인텔리 깡패의 성장과 시대적 배경

- 미국의 비호아래 성장

 

정건영은 1923년 도쿄의 부유한 재일교포 가정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한국으로 넘어와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이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 재혼한 아버지와 살게 된다.

 

계모 설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나보다. 정건영은 계모와 갈등을 일으키며 가족에 정을 붙이지 못한 채 싸움을 일삼고 다녔는데, 이때부터 그의 주먹은 빛을 발한다. 정씨는 1943년 센슈대학에 입학한 후 도쿄 히가시나카노 청년들을 규합, 이시와라 간지 휘하의 동아연맹이라는 단체를 거느리는 한편, 45년에는 재일조선인연맹(조련)에 반대하는 우파 민족주의집단인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을 결성하며 인텔리 야쿠자로 발돋움 했다.(정건영이 최배달과 처음 만난 것은 건청을 통해서였다. 당시 최배달(맹호라는 가명 사용)은 건청에서 경호업무를 맡고 있었다) 일본점령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우호적인 태도도 빠른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20대의 이주민이 점령군의 눈에 들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전 후 연합군사령부는 태평양 전쟁을 유발했던 극우 정치인·기업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일본의 전쟁의욕과 능력을 분쇄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으며, 동시에 일본의 좌파(노조,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를 강화시키는 방안도 함께 강구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시민(이른바 삼국인-중국, 대만, 한국)역시 점령군의 일본인 불신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암시장 등에서 우선권을 점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중국내 친미인사인 장개석이 자국내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고, 소련은 동유럽으로 세를 확장시키는 등 냉전이 시작되면서 삼국인들의 세상도 삼일천하가 되고 만다.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이 바뀌는, 역코스(Reverse course)가 일어난 것이다. 미 국무부는 대동아정책의 중심을 중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중국파와, 일본을 중심으로 소련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일본파의 대결에서 일본파의 손을 들어줬고, 일본 내 공산세력은 졸지에 미군 측에서는 단순한 불안요소가 아니라 소련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집단으로 전락했다. 곧장 미연합사령관은 노조 내부분열획책안을 수립,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동안 우파를 이용해 일본을 확보하려는 방침을 마련했다. 같은 시기, 한국에 들어선 미군정이 일본 관리유임정책을 펴며친일, 반조선전략을 취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일본인 무장불량배 집단 구렌타이야쿠자가 재일교포 및 중국인들(이른바 三國人)과의 싸움에서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일본 조직폭력연구의 바이블 야쿠자의 저자(데이비드 카플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1946년부터 이미 좌익에 대한 비밀공작으로 일본에서 깡패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작전의 총 지휘는 태평양전쟁 및 SCAP(점령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책임자였던 윌로우비 소장이 맡고 있었다. (중략)이러한 비밀공작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윌로우비 장군은전범자들로서 마땅히 처벌받았어야 할 주요멤버들을 정보기관에 고용했던 것이다.” 


재밌게도 기자는 확고한 실력이 있었던마치이의 활약상도 기록했다.

 

윌로우비 휘하 장교들은, 물론 G-2(미군정 방첩대)의 계획에 도움은 됐으나 반드시 일을 잘 처리하지는 못했다. 음모를 꾸미는 것과 가두시위 및 파업에 대처하는 것은 그래도 문제가 달랐다. 정말로 궂은 일에는 무명인물들의 비밀동원이 필요했다.

(중략)그런데 캐넌부대(비밀공작조)에 속해 있던 한인장교 한 사람이 분쟁을 맡아서 처리했다. 그는 당시 야쿠자의 주요 갱단 중의 하나인 동성회를 조직하고 있던 한국계 일본인 마치이 히사유키의 도움을 요청했다마치이는 그의 부하들에게 장총과 기관총을 동원하여 문제를 결말짓도록 명령했다. 결과 실력과시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미군의 요청을 받은 스물여섯 앳된 주먹패 리더가 중무장을 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한 셈이다. 하지만 정건영 본인은 미군정과의 연루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갱단임을 부인했다. <경향> 66713일자 보도에 따르면, 정씨는 일본 매스콤이 나를 왜곡악평했다면서 ‘긴자경시총감이란 별명도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반공 교포들의 전위기관 동성회(東聲會)를 갱단과 혼동한 때문이라고 밝혔다. 동성회가 조직폭력집단이 아니라는 식의 주장은 이어지는데, 사실여부는 후술할 내용에서 상세히 드러난다.

 


마치이의 날개’, 흑막정치의 대부 고다마 요시오이야기

한국-야쿠자 커넥션


<출처 : 조폭연대기>고다마 요시오


미군정을 등에 업은 정건영은 상해, 공갈, 사기 등의 혐의로 10번 넘게 체포됐으나 구치소에 들어간 것은 한 번 뿐이었고, 살인을 저질렀을 때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등 언제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한갓 재일교포출신 정건영이 김종필, 석정선, 김형욱 등 3공 실세와 술잔을 기울이며 외교적 핫라인을 꾸릴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고다마 요시오와의 만남이 컸다. 조직폭력단 전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사우스웰은 조폭연대기에서 고다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길에는 두 편이 있다. 하나는 햇빛이 내려쬐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그늘이 진 곳이다. 바쿠토(도박꾼)는 반드시 그늘에서 걸어야 하고 햇빛 쪽은 다른 시민들을 위해 내버려둬야 한다.


그러나 1945년 이래 많은 야쿠자 주요 인사들이 그늘을 떠나 대중들이 면밀하게 주시하는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많은 나라들과 다르게 일본에서 그들이 선택한 노출에는 비방 못지않게 갈채가 뒤따랐다. 거리의 양쪽 모두를 활보했던 야쿠자 인물들 중 가장 돋보이는 이가 바로 고다마 요시오다.“ 


사실이 그랬다. 고다마 요시오는 지하세계와 합법적인 기업세계, 주류정치를 넘나들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현대 흑막정치의 숙주였다. 정건영과 함께 65년 한일협정을 막후에서 지휘한 것도 그의 솜씨였다.


고다마는 1911218, 니혼마츠에서 기울어가는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0, 어린 나이에 조선으로 넘어와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그의 모교가 고교야구명문 선린상고였다는 점은 이채롭다. 그 후 고다마는 잠시 사회주의에 심취했었으나 곧장 극우로 전향, 국수주의 집단이자 비밀결사·테러집단인 현양사에 가담해 우두머리 도야마 미츠루 밑에서 일을 배웠다. “조직범죄와 정치를 결합시킨 (극우의) 영도자라 불리는 도야마 미츠루는 폭력조직과 정치세력이 교묘히 결합된 지금의 야쿠자 형태를 만든 장본인으, 극우집단이나 야쿠자들의 사무실에는 정신적 지도자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

 

이후에 고다마는 사이토 수상 암살사건에 연루되며 1937년까지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출소 후부턴 육군 본부에서 근무하며 정보원 생활을 시작한다. 훗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고다마가 자신에게 나도 옛날엔 정보쟁이였다고 말하며 자신을 긴장시켰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그의 첩보능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사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동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간첩활동을 펼쳤고, 30세가 되던 해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亞玉機關(고다마 기관)이라는 군수업체를 창설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다. 전 월간조선 기자 조갑제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다마 기관은 상해에 본부를 두고 전성기엔 2천 명의 직원을 부렸다. 아편 밀매에도 손을 대 방대한 자금을 마련했다는 의심도 받았으나 정확한 활동상황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태국에 약 30억 엔어치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지금 화폐가치로 치면 조엔대를 웃도는 재산이었다. 고다마는 일부 재산을 다이아몬드 등 귀금속으로 바꿔 일본으로 갖고 오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고다마의 비약, 그리고 동성회와의 만남

 

스가모 형무소 수감시절 고다마


2차 세계대전 끝 무렵 제독의 자리에 올랐던 고다마는 1946, 전범신세로 스가모 형무소로 송치됐다. 하지만 48, 미군정은 일본 내 좌파를 억제하기 위해 기시 노부스케, 사사카와 료이치 등 극우세력을 함께 고다마를 석방한다. 이때 미정보기관은 고마다에게 중국내 정보공유 및 미국의 정보원을 요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쨌든 고다마에게 3년여 수감생활은 정부 내외에 강력한 우익블럭을 조성할 수 있게 해준 전화위복의 시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세계적인 조직폭력전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사우스웰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가 거리의 합법적인 쪽과 불법적인 쪽을 종횡무진하는 가장 강력한 야쿠자 권력 브로커이자 거래 조정자로 거듭나게 된 것은 바로 이 기간이다. 스가모 교도소에서 그와 함께 지냈던 동료들 중에는 다른 A급 전범들이 있었다. 이들은 고다마의 평생 친구가 됐고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항하는 방어벽으로서 쓸모를 인정받아 미국인들에 의해 풀려난 후에는 고다마의 중요한 정치 및 사어 연줄이 된다. 고다마의 친구들 중에는 막강한 사업가 사사카와 료이치(자칭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파시스트“)와 미래에 수상이 될 기시 노부스케를 포함해 자민당을 이끌 몇몇 인사들도 있었다.”

 

1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본과, 그중 일부를 정당 창당자금으로 조달하며 얻은 우익 인맥, 여기에 G-2 등 미군정의 보호까지 손에 쥔 고다마는 역사학자 이반 모리스가 말했듯 막후인물로서 극히 강력한 힘을 가진 자로 발돋움했다. 실제로 고다마의 자금력은 자민당 1당지배 체제인 이른바 ‘55년 체제성립으로 이어졌고, 자민당 정권은 무려 38년동안 지속되면서 정부-권력엘리트-대기업간의 견고한 권력 트라이앵글을 형성했다

 

정건영도 도쿄를 중심으로 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앞서 밝혔듯 미군정과 공조하며 좌파탄압에 앞장섰고, 재일동포 내에서도 조련과 치열한 무력투쟁을 벌이며 몸값을 높이는 등 자기색깔을 강화했다. 한국 스포츠 지원사업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는데, 48년 런던올림픽부터 그는 물심양면으로 한국 선수단을 지원했다. 54년 스위스 월드컵 극동예선 때에는 참가불가 방침을 내린 정부를 설득해 출전허락을 이끌어내는가 하면, 후원회를 결성하여 유명 프로레슬러 역도산, 일본 최대 야쿠자조직 야마구치 구미의 중간보스 한록춘, 이희건 신한은행 회장 등으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모금하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최석영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6.25 종전)다음해인 1954, 스위스에서 월드컵이 열릴 예정이었지만, 한국은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일본에 선수단을 파견할 경제적 여력조차 없었다.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 1장을 두고 예선에서 한국과 일본이 싸워야 했지만, 경제적 사정 외에도 반일감정이 강했던 대통령 이승만이 출전을 반대하는 것도 큰 걸림돌이었다. 당시 재일본대한체육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던 정건영은 한국이 일본을 누르고 본선에 진출하면 한국뿐만 아니라 재일동포사회에도 큰 자신감과 용기를 준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선다.


형사사건 때문에 경찰의 감시 하에 있던 터라 한일 간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어서 심복을 서울에 보내 당시 이승만의 신임을 얻던 이기붕의 회유작업에 나선다. 이기붕의 집에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이승만을 설득하도록 집요하게 매달린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체재비와 교통비를 재일동포들이 전부 부담한다는 조건하에 승낙했는데 돈이 부족했다. 정건영은 일본 전역의 재일동포를 찾아다니며 모금활동에 동참해 달라 호소했고, 그 자신을 비롯해서 역도산, 신격호 등 유력인사의 도움으로 마침내 한국 대표팀의 일본 초청을 실현시킨다.“


1948년 한국 올림픽 선수단의 이동경로


정건영은 재일한국인 세력을 규합해 동성회를 세웠는데,(그 시기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김형욱은 55, 최석영은 57, 조성권은 48년으로 적고 있는데, 여러 서적에서 40년대 후반 정건영 그룹을 동성회라고 적은 것을 보면, 사실상 40년대 후반부터 조직이 꾸려졌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인원은 1500여명, 성회 회원수는 1600명 이상이고 그 세력권은 도쿄는 물론 아이치, 오사카, 오키나와에까지 미치는 방대한 갱단이었다. 일본 경시청도 야마구치구미, 이나가와 카이 등과 함께 10대 폭력단으로 지정할 정도였으니.

 

고다마는 감방 친구기시 노부스케를 수상에 앉혔고, 정건영은 도쿄의 신흥깡패로 급부상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또 왜 만났을까. 이동형은 도쿄에서 활로를 찾던 정건영 세력이 야쿠자들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야마구치구미와의 세력규합을 위해 고다마를 이용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양 측이 서로를 원했고, 미국을 매개로 보는 편이 옳다.

 

이유인즉슨, 48년 석방된 고다마는 G-2(미연합사 방첩대), CIA에 고용돼 미국 정부와의 인연을 이어가며 정--야쿠자를 중심으로 한 극우 반공연대 형성에 힘을 쏟았다. 야쿠자는 자신의 수족이므로, 당연히 자신과 공통점이 많은 집단을 찾았을 터


실제로 그는 야마구치구미와 동성회가 통합하기 2년 전인 1961, 기존의 우파 연합 가운데 충성심이 높은 세력을 추려 모집단보다 범죄성향이 강한 사상회(思想會)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우두머리가 마치이 히사유키, 즉 정건영이었다. 정건영 역시 미정보국을 도운 미국통이고, 사회주의계열 조련과 피튀기는 투쟁을 벌인 인물이라 어느 오야붕보다 매력적이었으리라. 심지어 고다마는 이들에게 나는 여러분들 각자각자가 적 한 사람이 아니라, 100여명을 죽여주기를 바란다.”고 주문할 정도였다. 데이비드 E 카플란은 다음처럼 적었다.

 

마치이는 또한 비일본인이라는 그의 신분을 한껏 활용해 점령기간 중 각종 비밀거래를 수행했다. 그는 미군당국을 위해 파업 분쇄 공작원 및 반공요원 등으로 일했다. 마치이는 미군 CIC(미국 정보기관)를 통해 고다마 요시오와 알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이 두 사람간의 두터운 관계는 시작됐다.반공이라는 공동의 목표와 돈벌이 기회가 결합됨으로써 이들은 민족적인 이질감을 원만히 극복할 수 있었다."

 

정건영도 고다마 요시오를 백분 활용했다. 고다마 요시오의 중재로 일본 최대 갱단 야마구치 조직과 협정을 맺었고, 기시 노부스케 수상, 사사카와 료이치 등 일본 최고위층과 친분을 쌓으며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등과 한국 실세와 접촉할 수 있었다. 야쿠자의 합법사업 수단인 미즈쇼바이(물장사), 빠찡코, 등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거뒀고, 고다마와 공동으로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어 거부 반열에 올랐다. 필로폰, 섹스관광 등 야쿠자가 한국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마치이였다.


2부, 정건영과 한일회담, 그리고 흑막 / 3부 정인숙, Sex, Drug & 정건영 / 4부 공짜는 없다, 50억엔 떠넘긴 재일 야쿠자 편이 이어집니다.


ps 한의과대학 졸업준비위원회(한의대 졸준위),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회, 관련 교직원으로부터 피해를 입거나 목격하신 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작은 용기가 밝은 사회를 향한 소중한 밑거름이 됩니다. 


forever2886@hanmail.net 배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