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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역사프리즘/현대정치사

[꼬꼬사 2편]정인숙의 70년 3월, 그날의 의문들/누구의 씨앗일까

[꼬꼬사 1편] 3공 최대의 권력형 섹스‧살인 스캔들 ‘정인숙사건’…진실은 무엇일까.

1편에 이어..703, 그날의 의문들

 

<출처 : 아이엠피터 제작>


1)사건의 재구성-사망 직전,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A) 정홍택 당시 한국일보 연예부 기자 

나는 성격상, 항간에 떠도는 풍문을 대충 쓰는 걸 싫어하는 편이어서 연예인들이 많이 나타나는 곳을 찾아다니곤 했다. 나이트클럽도 그 중의 하나이다그 날도 나는 남산 중턱에 있는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에 갔다. 8시 반쯤 되었을까? 나는 만나기로 한 일행보다 먼저 도착했고 클럽 안에서는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자 한 분이 카운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 술집에서 카운터 앉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 여인과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가까이 보니 아주 미인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하얀 것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내가 카운터에 앉자 그 여인은 나한테 술을 한잔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리벙벙했다. 이런 경우 술을 권하는 사람은 대체로 남자 쪽이 아닌가? 나는 솔직히 기분이 좋으면서도 쑥스러웠다. 내 느낌으로는 그녀에게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인데다가 우울한 분위기였다.

 

더욱 더 나를 묘하게 만든 일은 그녀가 밴드에게 연주해 달라고 주문한 노래 때문이었다. 그 노래는 릴리스 미(Release Me)’였다. 이것은 영국의 엥겔버트 험퍼딩크라는 가수가 부른 곡이고 그 당시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하고 있었다. “나를 좀 놔 주세요. 떠나갈 수 있게 놔 주세요.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나한테는 새로운 사람이 생겼답니다. 당신의 입술은 차갑지만 그이의 입술은 따뜻합니다.” 이런 가사 내용이다.

 

그녀는 이 노래를 세 번 네 번 연속으로 부탁을 했고, 악단은 계속해서 연주를 해 주었다. “아하, 이 여인에게 분명히 무슨 사연이 있구나라고 직감적으로 생각을 했지만 약 두 시간 후에 그렇게 큰 사건의 주인공이 될 줄은 정말로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물론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9시가 조금 지나서 그 여인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이트클럽을 빠져 나갔다. 나는 만나기로 한 일행과 함께 술을 조금 더 마시고 11시가 지나서 집으로 갔다.

 

B) 경찰의 조사내용. :


 “8시쯤 타워호텔 17층 나이트클럽에서 기다리던 40대 남자를 만나 술을 마시고, 1040분쯤 호텔을 나와서 남자는 크라운 승용차를 타고 떠나고 정인숙은 오빠가 모는 코로나를 타고 귀가했다. 남자는 을지로의 모 회사 전무.”

 

C) 오빠 정 모씨 주장


“70317, 집에 있는 정인숙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인숙은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상대방에서 지속적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정인숙은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잠깐 갖다 오자며 타워호텔로 향했다. 타워호텔 정문에 인숙을 내려주고 주차장으로 가니 20대의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1040분쯤 서울 자 2-262자동차 정문 앞으로란 안내를 받고 정문으로 가니 인숙이 나와 있었고, 그 뒤로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뛰어와 인숙과 이야기를 나눴다.” 


정홍택 기자 말에 따르면, 정인숙은 타워호텔 클럽을 떠난 시각은 9시 경. 경찰과 정 모씨의 주장처럼 정인숙이 1040분경 호텔을 빠져나왔다면 약 1시간 넘는 시간이 빈다. 여기서 정인숙이 나가기를 주저했고 주차장에 고위급 차량 20대가 늘어서 있었다는 정 모씨의 주장을 눈여겨 볼만하다. ‘이이제이이동형 작가는 경찰 조서는 40대 남자가 정인숙과 만나서 술 먹었다, 정종욱 오빠의 말은 (고관들과) 파티를 했다는 것.”이라고 요약하면서 그 시간, 파티에 참석한 정인숙이 고위층 인사로부터 출국권유를 받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을 내놓았다.

 

실제로 최대현 부장검사가 정 양이 살해되기 직전, (그녀가) 타워호텔에서 만났던 주 모씨 등 28명의 참고인에 대한 진술조서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고 언급했다는 걸 고려하면, 정인숙은 정홍택 기자 외 제 3의 인물과 클럽 밖에서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경찰은 이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지 않았다.

 

2) 구멍 난 사건 수사


<故 정인숙 친오빠 정 모씨/출처 : SBS 그것이 알고싶다>

 

그렇게 차를 몰아 정인숙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최대현 부장검사는 누이동생의 방탕한 생활을 참지 못한 정 모씨가 가문을 위해 살인을 결심했다면서 정인숙 앞가슴에 1, 왼쪽 귀밑에 1발을 쏘아 누이가 죽은 것을 확인, 누이의 로렉스 팔목 시계를 벗겨 앞좌석에 감춰뒀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찰은 정 씨는 범행 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 당인리 발전소 근처 강변 3로로 계속 차를 운전, 당인교 부근인 제 2현장(정씨는 1 현장에서 5m라고 진술했으나 실제로는 1.8km)에서 차를 돌린 다음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에 1발을 쏜 뒤 차의 오른쪽 문을 열고 철책 쪽으로 권총을 던졌다.”면서 (총에 맞은 정 씨가) 2현장에서 5m쯤 더 달린 다음 차를 세워놓고 있다가 지나가던 차에 발견됐다. 이때 차는 시동이 걸려 있었고, 브레이크를 밟은 후 기아를 빼놓을 정도로 여유 있는 상태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정 씨의 초기 경찰 진술은 이와 달랐다. 정인숙 양을 태우고 집 앞에 도착하자 갑자기 3m 앞쪽에 40세 가량의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가 길을 가로막아 차를 길옆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차를 멈추자 괴한은 오른쪽 앞문을 열고 운전자 머리 뒤로 손을 뻣어 느닷없이 권총 3발을 발사해 인숙 양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정씨는 오른쪽 다리가 따끔한 것을 느끼며 쓰러졌다고 한다. 정씨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범인이 달아난 후였다는 것이다.

 

89년 출감이후에도 정씨는 범행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자신이 절대 범인이 아니라면서 동생과 성일 아버지 관계를 이용하면 편히 살 수 있지 않느냐왜 그런 바보 짓을 하겠느냐. 모든 조작이라고 강조했다.

 

세브란스에서 치료와 함께 조사를 받으면서 이틀간 계속 부인하다가 면회 온 아버지가 ‘XX(사생아) 아버지가 뒤를 봐준다고 했으니 일단 네가 동생을 쐈다고 해 파문을 진정시키라고 말해 거짓자백 했다.”며 범인에 대해서도 한 사람은 얼굴에 흉터가 있어 기억한다. 자동차 중개상에서 일할 때 안면 있던 김해용이란 인물.”이라며 구체적으로 말했다.

 

누구 말이 진실일까. 검찰이 정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결정적인 증거는 당시 의복에서 검출된 화약흔. 하지만 지난 2010,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당시 사건자료를 토대로 상황을 재현한 결과, 정 씨가 직접 총을 쏘지 않았어도 본인 소매에서 화약흔적이 발견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사건 수사 곳곳이 구멍이었다. 경찰은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에 1발을 쏜 뒤 차의 오른쪽 문을 열고 철책 쪽으로 권총을 던졌다. 권총은 23일 정오 현재 찾아내지 못해 현장 근처의 공사 중 인부들이 가져간 것으로 보고 탐문 수사 중이라는 추측성 조사결과를 내놨으나, 재판이 끝날 때까지 범행도구를 찾지 못했다.

 

정 씨의 건강상태를 이유로 현장 검증도 생략했고, 복수여권 발급경위도 밝히지 않았다. 2시간 만에 현장을 정리하고, 공안부가 형사사건을 담당한 이유에 대해 의혹이 증폭됐으나 정부 당국으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정치권 발칵’, 누구의 씨앗?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 만약에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걸 /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1)’

 

‘A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걸 / 죽고나도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2: 원곡 나훈아 눈물의 씨앗) 



705, 정인숙 사건 탓에 국회는 발칵 뒤집혔다. 그녀의 사생아를 두고 조윤형 의원이 고관의 씨앗이라고 빗대는가 하면, 김상현 의원이 박정희 연루설까지 들고 나왔다. ‘씨앗출처가 관심을 끈 건 워낙 자극적인 소재이기도 하거니와, ‘아버지가 살인사건에 연루됐을 확률이 높기 때문.

 

같은 당 박한상 의원은 영국에서도 프로퓨모 국방장관이 미천한 콜걸과의 추문으로 물러나고 급기야 보수당 정권이 쓰러졌다.”면서 정 여인 생전에 사귄 각료는 몇이고 외교관은 몇이며 누구인지 밝히라. 정 모씨가 하수인이라 해도 반드시 그 뒤에는 교사자가 있을 것이야. 사람을 진짜 죽인 자는 처단해야 해.”라며 날을 세웠다.

 

정인숙 수첩에 거론된 국내 정계인사만 26-7. 여기에 대통령 관련돼 있다는 소문이 국회에서 회자되자, 권부는 폭풍우에 휩싸였다. 신임 중정부장 김계관은 정보단속을 단단히 못해 책임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육영수 여사는 눈물의 씨앗개사 가사를 가지고 와 박정희 대통령을 다그쳤다.

 

화가 단단히 난 박정희는 우선 김정렴 비서실장, 신직수 검찰총장 등 관계 각료를 소환했다. 그 자리에서 김 비서실장은 보도 듣도 못한 여인과 관련해 터무니없는 낭설이 유포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보고도 안했느냐는 호된 질책을 들었다고.

 

이쯤에서 잠시 생각해볼 부분은 박정희 독재체제가 이토록 중대한 추문을 사건이 발생한 지 2달이 지나도록 방치했겠느냐는 점이다. 당연히 아니었다. 정인숙 사망 직후부터 청와대는 분주히 움직였다. 심지어 권부에서 한 발 물러나 있던 JP가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었는지 사건 발생 즉시 청와대행을 택했으니까. 재밌는 건 의혹의 핵심 정일권 국무총리는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박정희와 접견을 끝낸 상태였다는 것.

 

임자(JP)가 그녀를 정 총리한테 소개했다면서.”

무슨 말씀인가요.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요.”

정총리가 제 발로 와서 다 얘기했어. 그 여자와의 관계도 다 말하고 갖고 싶던 사내아이도 낳았다고 했어. 그런데 그 여자가 죽은 건 자기와 무관하다는 게야. 용서해달라고 빌고 갔어.”

 

JP는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피살사건 자체는 철저히 수사해, 사회적으로 뒷말이 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건의하고는 돌아 나왔다. 그리고 훗날, 정일권을 만났을 때 그 때 일을 물었다.


  한일의원연맹 파티를 선운각에서 할 때 그 여자를 파트너로 처음 알게 됐다. 그 때 한일의련을 JP가 책임지고 있었으니 어찌 갖다 붙이면 소개나 다름없는 거지. 박 대통령이 지엄하게 묻길래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한 걸아무튼 미안하게 됐소.” 

역시 권력은 빠르고 영악했다.

 

박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정일권이 김종필을 아이 아버지라고 말했다는 주장도 있다. JP불충사건, 3선 개헌 문제로 미운털이 박힌 JP가 대노하며 정일권 총리에 찾아가 따져 묻자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했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어느 쪽이 옳은 지보다, 사생아 문제에 있어 정일권 총리의 진술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

 

I’m NOT your father

 


61년 쿠테타 즈음. 앞줄 왼쪽부터 '피스톨 박' 박종규 전 실장, 박정희 전 대통령, 차지철 전 경호실장


사생아 부친 과연 누구일까. 정인숙 가족들은 정일권을 사생아의 생부로 간주하고 있지만, 대통령 앞에서 자백과는 달리 정일권은 시시각각 말이 바뀌었고, 관계자 및 조사자들의 증언 또한 정일권, 박정희, 박종규 등으로 크게 엇갈렸다.

 

박정희의 엽색행각부터 시작해보자. 박 대통령의 18년 독재를 이해하는 코드 중 하나가 바로 섹스. 79년 군사재판에서 드러났지만,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뿐 아니라 60년대 취임 초기에도 박정희의 여성편력은 대단했다.

 

영화배우 문 모씨가 1991년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62년 만찬장에서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나 딸 하나를 낳았고, 이후 70년대 초반까지 관계를 유지, 서울 중구 순화동 집에서 딸 둘을 더 출산했으며 친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박대통령의 친필 편지 3통이 있다"고 주장한 대목이나, “육 여사에게 박정희가 주색잡기를 즐기는 안가에 대해 제보한 일이 있다며 세부사항을 밝힌 재미언론인 문명자의 회고록만 보더라도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육영수 여사가 남편박정희의 무분별한 외도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했다. 박정희 일가 중 유명한 A씨는 육 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박 대통령의)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고 밝혔다. ‘(정인숙 사건으로 인한) 부부싸움 도중 육 여사가 박정희가 던진 재떨이에 맞아 눈이 퍼렇게 멍들었고, 이를 취재기자 및 방문객이 목격했다.’는 기술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면, 영부인이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클린턴의 성추문을 접한 힐러리 여사는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는데, ‘빨대하나 꽂는 것쯤이야. 이쯤에서 피스톨 박박종규를 잠시 집고 넘어가기로 하자. 육사 출신 정치인인 그는 박 정권의 실세중 한명으로 5.16 쿠테타부터 지근거리에서 박정희를 보좌한 최측근이자 채홍사 역할까지 도맡은 충직한 부하였다. 박 대통령의 수상한 외출이 영부인에게 낌새라도 채이면 어김없이 닦달당하는 게 박종규 실장이었다고.

 

그랬던 박종규이기에 전국 1등 호스티스와 최고 권력자의 연결고리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은 어떤 측면에선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피스톨 박이 직접 박정희-정인숙의 관계를 밝힌 적이 없지만, 정인숙이 죽기 전부터 박종규가 일본에 퍼진 박 대통령 스캔들을 파악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는 사실이나 정 여인이 일본에 머물 때 그의 절친 야쿠자 정건영(일본명 마치이, 야쿠자 도세이카이(東聲會) 두목. 역도산 피습사건 때, 역도산의 전화를 가장 먼저 받은 인물이 정건영이었다-2편에서 상술)이 그녀를 돌봐준 점, 아이를 낳은 뒤 자꾸만 박 대통령 아들인 것처럼 행세했다는 정보나 워싱턴에서는 김동조 주미 대사를 검지 손가락으로 불렀다.”는 소문들, 복수여권 발급에 정보부 문학림 비서실장이 관여한 것, 심지어 박 대통령에 소개하기 전 피스톨 박본인이 정인숙과 관계를 맺었다는 정치인들의 증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최소한 둘 사이가 각별한(?)’ 관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아버지일까? 사실 파악을 위해 가장 활발히 움직였던 기관은 중앙정보부였다. 당시 정보부 간부를 맡았던 김 모씨는 청와대에서 부부싸움도 벌어지고 대통령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누구 소생이냐를 알아보려고 눈에 불을 켰다.”면서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대통령과 결부시켜 보면 닮아도 보이고 정일권 총리와 견줘보면 꼭 닮아 보였으니그 아이 특징인 쪽박귀가 박통 쪽인지 정 총리 쪽인지 모를 일이었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육 여사도 분주히 움직였지. 박 대통령 친지는 ‘()근혜가 전한 내용이라면서 생전에 육 아빠의 여자문제가 복잡해서 내가 다 알아봤는데 분명 아빠의 아이는 아니었다.’, ‘남들이 무슨 애길 하더라도 내 말을 믿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반면 3선 개헌의 역군임에도 당한 김형욱 전 정보부장은 자서전 <혁명과 우상>에서 사실상 아이 아버지는 박정희라는 주장을 폈다. 그는 , 문제의 아이 XX군이 정일권의 아들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아이의 정체를 알 수도 있었을 최대현(담당검사), 노진환(워싱턴 한인회장), 문학림(69년까지 김형욱 정보부장 비서실장)이 정일권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박정희가 상당한 의혹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침묵을 지켰을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출처 : 대통령 기록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일권 전 국무총리

김형욱은 당시 정일권은 과연 그만한 일을 강행할 만큼의 국정에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가?”라고 되물으면서 “(정일권이) 국회의원 자격도 없는 노진환을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밀어 넣고, 일등 공신 최대현을 청와대 사정 보좌관실에서 박정희의 비서로 일하게 할 만큼 정치적으로 강력했던가?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정일권 연루설을 일축했다r.

 

정일권에게 사건을 직접 물었다는 야당총재 출신 이 모씨는 정씨 말은 딱 한 번 관계했을 뿐이고 아이 건은 박통 것을 뒤집어썼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자신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더라도 친자검증 도구마저 전무한 상황에, 절대권력자의 뜻을 거스르며 팩트를 말할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정의 권력으론 어림없는 일이란 김형욱의 주장과 엄혹한 시대상황 등을 고려한다면, 용의선상에 함께 오른 정 총리가 주군을 위해총대를 멨을 것이란 음모론도 설득력 있다.

 

굴곡진 가족사아버지의 진실은 그곳에?

 

<출처 : 선데이저널USA>


헌데 그 가정이 옳다면, 즉 정일권이 방패막이로 나선 것이라면 풀리지 않는 의문이 몇 가지 발생한다. 첫 번째는 정 총리의 해임이 왜 정인숙 사건이 꺼진 다음에야 진행됐냐는 점이다.

 

총리 해임 시점은 1심 판결 3개월 후인 1220. 정일권 총리가 몸을 던진 것이라면, 사태가 국회로까지 확산되기 전에 꼬리 자르기를 하는 편이 효과적일 텐데, ‘정 총리를 물러나게 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한 콧수염김성곤에게 무안을 주면서까지 총리교체를 미룬 건 납득하기 힘들다.

 

이 부분에 대해 박근혜는 그 사람은 사표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찾아와 '제가 관계했던 여자이지만 결코 살인은 하지 않았다'고 울면서 사죄했다.”면서 아버지는 그때 그 당사자를 문책하게 되면 (그가) 살인자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같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정인숙 가족들의 태도다. 사생아 정 씨(이하 정B) 및 오빠 정 모씨는 여러 인터뷰에서 아이 아버지로 정일권을 지목했다. B씨는 91년 귀국 직후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씨가 67년 어머니와 교제해 다음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91년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정B씨는 외삼촌 정 모씨, 가족의 권유를 이유로 소를 취하했으나, 933월 돌연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간했고, 2달 뒤에 정일권을 상대로 다시 친자소송절차를 밟는다.

 

여기서 200748일자 <일요신문>의 보도를 살펴보자. 기사문은 정 전 총리 측 한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정 전 총리의 측근인 김 아무개 전 의원과 얼마 전 식사를 함께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가 최근 납치범으로 보도된 정 씨에 대해 고개를 흔들더라. ‘(금전적으로)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도 툭하면 손을 내밀고 하더니, 그 못된 버릇을 못 버리고 이런 흉악한 범죄까지 저질렀다고 분개하더라고 전했다.

 

김 아무개 전 의원은 금전 제공부분에 대해서는 즉답을 피하면도 어쨌거나 정확한 DNA 검사를 하지 않았으니 (친아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정 씨가 넷째외삼촌과 함께 돈을 얻을 요량으로 정 전 총리를 직접 지목하면서 친자확인소송을 하느니 소동을 벌여 상당히 곤혹스러웠다며 정B씨의 반복적 소제기에 강한 불만감을 드러낸 것.


그는 91년 소송의 경우엔 정 전 총리 측에서 거액을 주고 일단 무마시켜 (B) 취하했다면서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또 한국에 나타나서 방송 인터뷰니 뭐니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 정 전 총리 측에서 아주 고개를 흔들 정도로 불쾌해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상종해선 안 될 놈이라는 막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고 털어놨다.

 

B씨가 친자확인 문제를 사욕 채우기의 도구로 악용했다는 것. 2007년 골프장 사장 납치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등 정B씨의 양심이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송의 상대방이 정일권 전 총리였다는 사실이다.

 

정 전 총리의 일관성 없는 해명에도 의문부호가 남는다. 앞서 서술했듯이 박 전 대통령에게는 자신의 실수임을 시인했으나, 주위엔 박통 것을 뒤집어썼다고 해명한 대목이 대표적.

 

일관성 없는 그의 주장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설가 선우휘의 동생 선우련은 자신의 비망록에서 정일권이 70년 늦봄,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던 형에게 술자리에서 정인숙씨를 알게 돼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도 없고 고민이라고 말한 사실을 기록했는데, 같은 해, 문명자 전 청와대 출입기자에게는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 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고 고백한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로부터 6년 뒤 정 전 총리와 재혼한 부인이 2남매를 출산한 것. 뒤에 문 기자를 만난 정일권은 불임수술을 풀었다고 먼저 밝혔다고. ‘정 전 총리 불임이 사실이었는지도 미지수다.


ps 한의과대학 졸업준비위원회(한의대 졸준위),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회, 관련 교직원으로부터 피해를 입거나 목격하신 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작은 용기가 밝은 사회를 향한 소중한 밑거름이 됩니다. 


forever2886@hanmail.net 배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