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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역사프리즘/현대정치사

[꼬꼬사 3-2] 65년 한일협정과 정건영 : 야쿠자, 한국을 '이용'하다


<출처 : 월간조선> 좌측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 정건영, 조규화. 재일교포인 조씨 또한 '극동회'란 범죄조직을 이끄는 야쿠자다.


친일파·비리인사로 가득한 마치이 인맥

 

정건영과 고다마가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은 65년 한일협정이다. 1965년 성사된 본 조약은 한일국교 정상화라는 취지하에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주도로 체결됐다. 기본관계(식민 지배 무효 확인), 청구권(3억 무상원조+2억 차관), 한일 어업(40해리12해리로 영해 축소), 문화재문화협력 등 여러 분야의 협의 사항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3억불 배상금을 결정한 대일 청구권 부분은 위안부 문제등과 결부돼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마치이 히사유키는 어느 과정에서 개입했을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50년대부터 시작된 한일 회담과 정건영 인맥의 시발점인 재일본대한체육회 역사를 함께 추적해야한다.(재일 체육회에도 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다수 출현한다.) 우선 전자부터.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은 1951년부터 시작됐지만, 10여 년에 걸친 교섭에서도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부에 이어 민주당 정부도 한일 회담을 추진, 601025일 제 5차 한일회담이 열렸으나 5.16 쿠데타로 다시 중단됐다.

 

만남이 제자리를 맴돌자, 미국이 압박하고 나섰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으로서는 한반도와 일본을 연계해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 미 정부는 5.16 쿠데타 정부를 승인해주는 대가로 한일회담을 조건으로 내거는 한편, 627월에는 주한 미 대사관에 훈령을 보내 한국 정부에 청구권의 명목에 구애받지 말고 일본의 경제 원조를 받아들이라고 전하고, 마약 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원조를 다시 고려하겠다고 합력을 가할 것을 지시했다.

 

집권층 상당수가 일본 육사·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박정희 본인도 쿠데타 이전부터 경제성장의 실마리를 한일 국교정상화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에, 집권 5개월 후인 6110,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보내 협정의사를 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조갑제는 때마침 전세호(재일 거류민단 학생동맹 위원장)와 비자금 조성혐의로 도피중인 전 주일대사 유태하를 만나 일본 실세와 접촉할 실마리를 찾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유씨는 초대 재일본대한체육회 회장(부회장 정건영)을 역임했다.)

 

전세호는 박정희 의장의 혁명 정신에 적극 찬동하면서 유태하 대사를 급히 귀국시켜 그가 구축한 일본 정계의 로비망을 활용해야 한일회담이 성공할 것이고, 이를 통해 경제 부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최영택은 일본에 가서 전세호의 협조 하에 유태하 대사를 귀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최영택은 유태하 대사를 서울 정동호텔에 구금시켰다. 이병희 서울 지부장이 수사를 담당했다. 이병희는 유 대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집중 질문했다. 첫째는 이 박사의 비자금 500만 달러의 행방이었다. 유 대사는 날 믿어 주시오. 비자금은 모략입니다. 한일 교역을 통해 자금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친한(親韓) 인맥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것입니다. 날 데려왔던 최영택 국장을 만나게 해주시면 모든 것을 다 털어놓겠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유태하 대사는 최영택 국장에게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조하겠다며 자신이 구축해 온 일본 정계 내 막후 실력자들의 인맥을 전부 설명해 갔다. 그는 최국장께서 일본에 가시게 되면 잘 됐습니다. 여지껏 투자한 것을 잘 활용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신군부 최고회의는 일본의 막후에 선을 대지 않고는 한일협정 타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최영택을 외무부 주일 참사관으로 기용, 실세와 접점을 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최씨는 일본 외무성, 재일교포 거류민단 중앙본부, 재일 한국 경제인 연합회를 돌며 주로 전 총리인 기시 노부스케나 일본 우익세력의 막후 실력자 고다마 요시오에게 접근, 다리를 놓아줄 것을 간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마도 이때 정건영을 만난 듯하다. 48년부터 민단 체육회 일을 맡아온 정건영은 53년에는 유태하 대사가 회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부회장을 역임했다. 고다마 직속부대 사상회두목을 맡은 것도 61년이다. 당시 상황을 작가 이동형은 이렇게 설명했다.

 

최영택은 정건영에게 비록 외국에 있지만 항상 조국을 잊지 말고 조국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설을 풀고, 정건영은 당연하다. 안 그래도 내가 반공을 위해 여기서도 열심히 뛰고 있다. 일례로 역도산이 이북 출신인데 이북에 딸이 하나 있다. 그래서 그 딸 편지 받고 이북으로 가려 했으나, 내가 가면 죽인다고 해서 못 갔다.”라며 대한민국을 위해 애쓰는 사람인 것처럼 떠벌렸다.“

 

<출처-국가기록원>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기시 노부스케-고다마-정건영의 힘은 대단했다. 유태하 일본인맥활용 제안은 적중했고, 한일관계 정상화는 급물살을 탔다. 61년 한일 정상회담과 6차 한일회담, 62년 김종필-오하라 비밀회담을 거쳐 643, 급기야 정부는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방침을 공개했다.

 

학계 와 시민단체는 물론, 종교인, 문학인, 심지어 예비역 장성들까지 강력하게 반발했다. 657, 김재준, 함석헌 등 기독교 목사·교역자 166명은 연서를 내고 국민의 애국적 행위를 권력으로 탄압하지 마라. 한일협정 비준을 거부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포기하라며 항의했다. 문익환, 성래운, 김동길 등 재경대학 교수단 359명도 선언문을 발표하며 첫째, 치욕적인 불평등 협정을 결연히 거부하고, 둘째, 애국학생들에 대한 비인도적 처사를 사과하고 구속학생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3공 정권에 합류키로 했던 몇몇 예비역 장성들도 다음과 같이 반대 입장을 밝혀, 끝내 박정권과 등을 지고 말았다.

 

잔학과 수탈로 일관했던 과거의 일본 식민정책에 대한 속죄와 보상은 전혀 몰각이 되고 이미 무효임을 천명함으로써 일제의 죄책을 합법화시켰으며, 연간 1000만 달러 상당의 무상공여와 국제적 비교로 봐서 가장 불리한 조건의 차관 2000여만 달러 어치의 일본 상품과 용역의 도입으로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문화의 강탈에 대한 청구권에 대차한다는 것은 이 민족의 역사가 그것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출처 : 재일본대한체육회 60년사> 우측 끝이 정건영


반면 정건영은 한일회담을 발판삼아 세 불리기에 열을 올렸다. 가장 먼저 이용한 것은 스포츠였다. 629월에는 한일회담 수석대표인 배의환을 재일대한체육회 명예고문으로 위촉해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한편, 올림픽 선수단에 물품을 제공하거나 대한체육회관(맘모스 체육관)건립비용으로 1500만엔(한화로 약 1125만원/65년 쌀 80kg 도매가격3324)을 쾌척하는 등 경제적 지원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는 정치 로비에도 적극적이어서 한국 운동선수뿐 아니라 일본을 찾는 스포츠 관계자, 정부 요인은 물론 야당정치가에게도 술과 식사를 대접하거나 용돈을 건네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종필, 최영택은 물론 김영삼도 그 대상이었는데,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의 한 원로의 말에 따르면 당시 정건영 씨에게 돈을 받지 않은 한국 정치인은 거의 없을 정도로정치적 스킨십이 뛰어났다고 한다. “박종규 경호실장을 비롯한 국내 실력자들과 교분을 굳힌 것도 이 무렵부터였는데, 실제로 정건영은 중앙정보부와 협력하여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체제선전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동경지사장이었던 김충식의 말이다.

 

63년 1월, 역도산의 첫 방한 소식


“1961, 역도산은 일본 니가타 항에 들어온 북한배 안에서 북에서 온 둘째 형 김공락과 친딸 김영숙을 비밀리에 면회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김일성의 환갑 선물로 독일제 벤츠승용차를 보내 지금도 이 차가 북한에 전시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19631월에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주선으로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해 김재춘(金在春) 당시 정보부장과 만나기도 한다. 판문점에 들렀을 때는 북쪽을 향해 포효하듯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중략)

역도산이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은 그의 바람막이 노릇을 하던 일본의 우익정객 오노 반보쿠와 고타마, 정건영 등이 역도산의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었다. 역도산은 북측에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리면 선수단 체재비를 대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한국 중앙정보부와도 인연을 맺는 줄타기 외교를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숙명이었을까.“


헌신적인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966, 대한민국 정부는 정건영에게 KOC(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위원, 67년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총본부 상임위원의 자리를 맡긴 데 이어, 68년에는 국군체육향상에 기여했다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귀국할 때 현직의원의 영접을 받은 것과 김포공항을 드나들 때도 통관절차도 없이 VIP실로 다녔다는 사실도 회자됐다. 5.16 세력과의 친분을 상징하는 예우였지만, 그가 깡패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일본 언론의 표현처럼, 야쿠자가 정상배가 된 것이다.


꼬리에 꼬리 무는 현대사는 매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다음 주에는 3부 정인숙, Sex, Drug & 정건영편이 이어집니다. 좋은 의견, 엄지 손가락 응원은 언제나 큰 도움이 됩니다~


ps 한의과대학 졸업준비위원회(한의대 졸준위),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회, 관련 교직원으로부터 피해를 입거나 목격하신 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작은 용기가 밝은 사회를 향한 소중한 밑거름이 됩니다. 


forever2886@hanmail.net 배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