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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역사프리즘/현대정치사

[꼬꼬사 3-3편] 섹스, Drug, 야쿠자, 그리고 정건영


<출처 : 채널A>칠성파 두목 이강환과 일본 야쿠자 조직 사카우메 구미의 회합장면. 70년대부터 야쿠자와 교류한 이강환은 1980년, 히로뽕 제조로 구속돼 5년간 복역했다.


[꼬꼬사 3-2] 65년 한일협정과 정건영 : 야쿠자, 한국을 '이용'하다

[꼬꼬사 3-1] ‘긴자 호랑이’ 정건영과 야쿠자- 3공 커넥션.

깡패는 깡패일 뿐…교포 야쿠자 정건영

 

인종주의자, 파시스트, 지독한 국가주의자, 야쿠자 등 극우세력은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한다. 동양대 진중권이 극우는 상대를 절멸하려 든다. 그게 그들이 이견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극우의 생리를 설명한 것처럼, 그들은 상대를 '빨갱이'로 몰아놓고 '척살'한다

 

히틀러, KKK, 네오나치, 백색테러를 수없이 자행한 김두한과 백의사가 그랬으며, 지질하지만여성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일베도 유사부류다. ‘강한 놈이 다 먹는힘의 논리로 관계를 설정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이들에겐 무엇보다 생존이 절실하다. 살아남기 위해 교활하고 폭력적이며 잔혹한 수법을 사용하면서, ‘애국이나 비장함’, ‘의협심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들에게 '도덕''양심'은 사치다.

 

정건영도 이러한 정글집단에서 뼈가 굵은 인물이다. 그는 비주류 이방인이었고, 가정형편도 좋지 않아 불안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나이부터 주먹패 삶을 살았다. 누구보다 생존을 갈구했던 그는 동포를 모아 폭력단을 조직했다. 그가 세운 동성회는 갱단 가운데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잔혹성과 비밀거래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고.

 

이후 반공우익의 기수로 활약하며 조련’(조총련)과 잔혹한 세력다툼을 벌인 그는, 외국인을 처단하는 해결사 역할을 수행해 미군정 정보부라는 거대 권력과 결탁하는 정치적 수완도 발휘한다. 결국 미국과의 접촉은 흑막의 숙주고다마 요시오와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며, 때마침 찾아온 한국중앙정보부원들과 손을 잡으면서 65년 한일회담 성사에 공을 세웠다. 본격적으로 정치건달’, ‘극우 깡패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야쿠자 돈줄, '히로뽕'


한일회담 이후, 양국 실세의 비호 하에 부산-시모노세키 운항권까지 획득한 정건영‘10월 유신지지, 새마을운동기금 지원활동을 벌이며 친군부적 행보를 이어갔다. 권력에겐 머리를 조아리고, 반대세력은 적색분자로 매도하며, 친일인맥을 정치적 도구삼아 영전을 꾀하는 극우파의 생리. 그들의 나쁜 습관을 그대로 답습했던 정건영은 깡패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을 몰락시킨 외환은행 불법대출히로뽕은 정건영이 속물적 극우 깡패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한국 언론은 1966년 정건영의 재산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그러던 그가 우연한 기회에 부동산 투자에 송공, 이제는 東京銀座9층이나 되는 빌딩을 비롯해서 1백여억원의 재산가가 됐다.” <경향> 66747

 

최근 실업계에 투신, 무역 및 관광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정씨는 지난 5월 동경 한복판에 동양 최대 규모의 디럭스 호텔을 지었고, 현재는 또 銀座에다 순 한국식 호화판 레스토랑을 건축 중이다. 도자기 수집가로도 알려진 그는 이 방면에 일가견을 갖고 있는데 현재까지 모아온 고려청자 등 3백여 점의 도자기를 내년쯤에 불란서 루블박물관에 기증,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동아일보> 1966763

 

정건영의 재산을 쌀 가격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화폐가치로 4200억 원 정도. 66년이 한일회담 직후라는 점을 고려하면, 양국정부로부터 보상받기 전부터 정씨는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던 셈이다.



<출처 MBC 뉴스데스크> 1989.10.15 LA 타임즈의 '한국마약유입 실태보도'를 전하고 있는 손석희 앵커

주요 돈벌이는 무엇이었을까. 정건영은 48년부터 깡패조직 <동성회>를 운영하면서 미즈쇼바이(물장사-요식업 및 술집)와 빠찡꼬 사업으로 재산을 늘였다. 또한 프로레슬링업계에 발을 들이며 역도산을 내세워 흥행에 앞장섰으며, 고다마 요시오와 함께 부동산 투자에 참여하면서 거부로 성장했다. 마약거래도 손을 댔는데, 일본 경찰은 <동성회>가 초기부터 히로뽕 거래에도 진출해 줄곧 이 분야를 장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80년대 사회문제로 비화됐던 히로뽕 사건, 이른바 코리언 커넥션을 면밀히 취재했던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는 마약밀매의 근원지 중 하나로 마치이, 정건영을 거론했다.

 

"제 1차 히로뽕시대에 재일동포가 많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1954년이 경우 검거된 히로뽕 사범 가운데 한국인은 14퍼센트(일본내 재일동포는 0.5퍼센트)였다. 밀조범 가운데 55퍼센트, 밀매범 가운데 21퍼센트가 한국인이었다.

(중략) 결국 코리언 커넥션의 수원지는 폭력단내 한국인과도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전후 많은 재일동포들이 그 혼란기에도 마치이의 이름을 댐으로써 일본 폭력단으로부터 봉변을 면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마치이는 야쿠자 세계에서는 지금 은퇴했고 동성회는 1966년 해산했다. 경찰청에선 동성회가 동아 우애 사업 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어 존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아 조합의 이사장은 한국 이름이 오남길인 오키다. 오키나와 군마현 등 5개소에 지부를 두고 682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 이 조직은 경찰청이 작성한 히로뽕 밀매 주력 폭력단 리스트에도 올라 있다. 1976년 한국으로 도망, 도쿄 다케우치조 두목 다케우치 다카하시와 손잡고 최대 규모의 히로뽕 밀수 루트를 만들어 약 200킬로그램을 일본으로 보냈던 박노식은 동아 조합의 간부였다."

군부정권시절, 조갑제는 부마사태, 광주 민주화운동을 일선에서 취재했던 열혈 민완기자였다. 1981년 부림사건 당시, 검찰 공소장 금서목록 속에 <월간조선>이란 이름이 들어 있는 게 낯설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진중권은 이인화, 조갑제가 변한 것을 보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저술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일본 극우집단과 연대가 형성하던 그 시기, 동시에 히로뽕이 등장한 것이다. 훗날 자신의 아들 박지만이 히로뽕 중독자로 전락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지만, 아무튼 폭력-권력 유착은 박지만, 가수 이승철 등 유명인부터 회사원, 학생, 가정 주부, 심지어 국회의원 사모님까지 마약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출처 경향신문> 1989.2.27일자 박지만의 히로뽕 상용혐의 보도

한일회담을 성사시킨 대가로 정건영에게 부산-시모노셰키 페리 운영권 얹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경향신문> 이재인은 부관페리 개통 후 이 땅에 오고가는 전문적인 일본인 밀수꾼들이 생겼는가 하면 일본의 폭력조직이 들어왔다는 일본 경찰의 발표가 있었다면서 동경 물결은 차차 정상적인 분별을 잊어가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밀수 품목도 히로뽕, 손목 시계 및 위조지폐, 금괴, 보석, 녹용 및 한약재 등 다양했으며 범죄 수법도 교활해, 14세 재일교포를 속여 히로뽕 밀반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부관 페리호가 한일 범죄의 중심 통로로 이용됐던 것이다.


 

야쿠자들이 히로뽕 제조기지로 한국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친일청산에 실패하면서 양국의 정치문화가 닮아있었다는 점이 컸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일본의 우익과 폭력단이 정계의 막후와 지하의 범죄세계에서 한국의 정치인 및 범죄꾼과 밀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양국의 정치토양과 사회분위기, 그리고 인맥의 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일본 최대 폭력단 야마구찌조가 한국의 마약범죄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아래서였다.

해방 뒤에 우리가 친일부역자들을 제대로 단죄했더라면 고다마 요시오 같은 특무기관 출신 전범이 한국정계에 선을 달 수도 없었을 것이고, 아무리 깡패세계라고 해도 사무라이를 흉내 내는 반민족적 폭도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Sex, Drug & 야쿠자, 그리고 정건영

 

<출처 : 동아일보>1973년 5월 16일 일본인 기생관광 실태.

1960년대 초반, 일본 경찰이 대대적으로 폭력단 소탕작전을 펼치자 견디다 못한 정건영은 63, 41, 자본금 5억엔 규모의 합법 사업장 동아상호기업을 세웠다. 한일 양국의 실력자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을 넘나들며 빠찡꼬, 히로뽕, 관광요정사업 및 부동산 사업을 벌일 수 있었다


그는 도쿄 긴자에 7층짜리 유흥센터‘TSK-CCC'를 세우고, 고급 레스토랑과 카바레, 디스코 클럽, 핀란드식 사우나탕, 비버리힐스 스타일의 미용살롱 등 사교클럽을 유치했다. 이곳 회원은 도쿄 긴자의 16개의 사교클럽을 이용할 수 있었고, 스키장과 36개홀의 골프장, 놀이터, 주택단지 등 회원을 위한 부대시설도 마련하기도 했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도쿄 긴자에 두 개의 거대한 빌딩을 포함, 나이트클럽, 요정, 음식점 등이 19개나 있다. 유명한 한국 요정(秘苑)도 그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정인숙이 요정업계에 뛰어든 것도 바로 이때쯤 이었다.(정인숙은 당시 전국에서 첫손가락에 드는 접대부였다. 어느 관계자의 증언 청와대 모임에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2백여명의 아가씨들이 차출됐는데, 그 중에서 성적순으로 50명을 뽑고, 다시 신원 조회를 통해 25명을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미모 순으로 다섯 명을 뽑았습니다. 5명 중 정인숙이 1등으로 뽑혔지요”)

 

여기서 요정관광사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인숙과 정건영, 그리고 박정희가 연결되는 또 다른 키워드도 요정이다. 실제로 야쿠자들은 1960년대 초반 일본 경기가 회복되자 대만-한국에서의 매춘관광을 추진했다. 그 규모는 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더욱 커져, 전체 해외 관광객 가운데 일본인 비율은 65년도에 15%, 60년대 후반에는 30%, 71년도에는 41% 등 꾸준히 상승하였으며, 73년도에는 80%까지 치솟았다.


 국 별

 관광객 수

남 자(%) 

여 자(%) 

 한 국

 525,326

93.7

6.3 

 대 만

 618,538

91.4 

8.6 

 필리핀

 190,637

83.7 

16.3 

 태 국

 80,140

78.9 

21.1 

 미 국

 1,410,320

59.4 

40.6 

 프랑스

 166,622

50.5 

49.5 

<표 1 자료> 일본 법무성 : 일본인의 해외여행(1979년)


관광객을 상대로 윤락업이 행해지던 관광요정, 이른바 기생하우스는 주요도시마다 들어섰다. 영부인 공덕귀 여사는 우리 딸들을 도매금으로 팔아넘기기 위해서 밤마다 흥청대는 관광요정은 우리나라에 통틀어 27라면서 서울 종로구에 K, D, C, M, S, O, C, C, P, D, 중구에 B, 성북구에 D,S, 도봉구에 S 14개의 요정이 있고 부산에는 D,B,C,K,J,H 7, 경주에 S,H,Y,K 4, 제주도에 B,C 2라고 구체적으로 꼬집었다. 또한 기생현장의 백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다른 사진은 웃옷을 벗어제친 일본인 관광객들이 와이셔츠 바람으로 한복 입은 기생과 두손을 맞잡고 서서 댄스를 하는 장면인데 이러한 사진 밑에는 예외없이 기생파티의 절정이라는 설명이 붙게 마련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술에 취하고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취하게 돼외국인으로서의 체통이나 도의 정신이 마비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특수한 배경이 깔려 있는 이유로 내심 겁을 먹었던 자들이라도 그런 따위의 알레르기 정도는 말끔히 씻어 주기에 족할 만큼 분위기가 된다는 것이다.

술판의 끝이 가까워지면 이 자리의 분위기는 아예 수라장이 된다. 그 사이에 기생 아가씨들은 호텔 잠자리에서까지 자신의 서비스(일본인들의 표현)가 필요한가를 물어서 확인해 둔다. 어떤 성급한 친구들은 요정에 도착한지 10분도 채 안 돼서 짝만 맞추어 주면 기생아가씨를 데리고 항상 대기하고 있는 영업용 자가용을 타고 쏜살같이 달아나기도 한다.“

 

일본 어느 항공사는 여행 가이드 17<한국의 여행>이라는 소책자에서 한국의 밤을 장식하고 즐거웁게 하려면 먼저 기생파티를 필두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화려한 민족의상인 치마저고리를 입은 기생의 서비스의 밤은 만점으로 정평이 나 있다.”라고 적나라하게 홍보했다. 70년대 말 일본 해외 여행자의 약 3분의 1을 취급하고 있는 일본항공(JAL)한국의 밤은우선 기생파티로부터 시작하십시오화려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더할 나위 없는 한국 여인과의 하룻밤은 황홀합니다라며 노골적으로 승객들을 유혹했다.

 

정부, 외려 기생관광대대적 홍보대한민국의 어두운 그림자

문교부 장관 한국의 기생 호스테스의 분투, 애국충정은 훌륭한 것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 70년대 호스티스 문화를 등에 업고, 직업여성을 그린 영화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본 부녀들이 집단적으로 섹스침략 반대” “매춘관광반대등의 삐라를 뿌려가며 일본항공(JAL)사모소 앞에서 시위를 벌일 정도로, 일본인 윤락관광실태는 심각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 19688월 교통부는 외국관광객 유치로 연5백만달러 수익을 올리겠다며 <관광진흥을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면서 우리나라 특유의 한국요정과 기생을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방침을 공개했다.

 

심지어 717, 안동준 국제관광공사 총재는 “(관광진흥의) 묘안이란 한국의 토속미와 생활의 풍경을 외래관광객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 중 손에 꼽히는 것이 의식(衣食)과 주(), 그리고 여자라면서, "청주(淸酒)와 기생이 지금은 일본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돼 있지만 역사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고증이 있는 점을 인식시켜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신은 일 관광객, 기생에 군침” “기생의 분투에 문교장관이 최대의 찬사라는 식의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한국 정부를 비꼬았다. 19731026일자 주간 아사히는, 일본을 방문 중이었던 민관식 장관이 동경의 한국학원을 찾아 한국 여성은 경제건설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몸을 바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기생 호스테스가 대거 일본에 진출해서 몸을 바치며 밤낮으로 분투하는 애국충정은 훌륭한 것이라고 연설한 내용을 보도했다. 타임지는 73527일자 판에서 일부 한국인들은 한국이 일본의 환락가로 변하고 있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면서 기생들이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 이용걸 교통부관광국장의 발언을 전했다.

 

정건영 및 야마구치 구미 등 일본의 조직폭력세력이 마약, 섹스 산업의 전초기지로 한국을 선택했고, 정부 역시 외화벌이라는 천박한 명목을 앞세워 기생관광장려정책을 마련해 이들을 거들면서, 한국은 기생천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신군부-운수 대기업-야쿠자-일본 흑막 연대가 빚은 현대사의 비극인 셈.

 

"배꼽 아래 '국격'은 있었나"


그러나 정권차원에서 호스티스문화를 비호했던 데에는 신군부의 도덕적 불감증 등 내재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저서 룸사롱 공화국에서 기생파티가 성행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정정치 청산/기생파티 척결)요청은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부터 기생파티를 위해 뻔질나게 워커힐을 찾고 그 바람에 심심하면 육박전을 벌이곤 했는데, 무슨 수로 기생 파티를 없앨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는 야당 정치인들에게 정치 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파티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의 기생파티는 산업적 규모로 성장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외화벌이에 기여하게 된다.”

 

실제로 신군부는 배꼽 아래 인격에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 삼청각 증축을 지원, 한꺼번에 5-6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요정을 이었다. 군도 마찬가지어서, “모 보안사령관은 집무실 옆에 전용 사우나실을 만들고는 청와대 상납용이라는 핑계를 대고 마사지 걸두명을 채용, 일과시간에도 수시로 마사지를 즐겼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였다. 고위층과 숱한 염문을 뿌린 비운의 요부정인숙이 총격으로 사망한 것도 이 시기였다.

 

군사정권의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폭력성도 한국을 섹스관광지로 격하시킨 주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35년 식민지배의 고통을 3억불과 맞바꾼 3공 실세들은, 한국 여성들의 까지도 외화벌이수단으로 사용할 만큼 맹목적이었다. 장관이 공개적으로 매춘도 애국이라는 망언을 뱉을 수 있었던 것도,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팔 수 있다는 폭력적이고 단순한 사고에 기인하는 것이다.

 

정부는 외신의 비판을 어떻게 대응했을까. “서울시는 김동길, 안병욱, 장병림 등 국내 최고의 유명교수를 초빙, ‘관광한국의 이미지 쇄신이라는 목적 하에 4000여명의 호스티스를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모 교수가 일본이 2차 대전으로 패망한 후 가문 있는 집 아가씨들도 모두 호스티스를 자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고 열변을 토하자 일순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고“.그들답게해법도 천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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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ver2886@hanmail.net 배동일